본문 바로가기

부활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6-7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테필라 2025. 4. 6.
반응형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 기억하라, 말씀하신 대로

부활주일 아침, 우리가 다시금 듣게 되는 이 복음의 말씀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누가복음 24장 6-7절의 말씀은 부활 사건의 현장에서 전해진 하늘의 선언이며, 부활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는 주님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천사의 이 첫 마디는 부활의 현장에서 터져나온 하나님의 승리 선언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생명이 아닌 부패와 침묵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무덤 안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의 헬라어 표현을 보면,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ouk estin hōde로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에 속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없었고, 사망은 그분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존재론적 부재를 선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생명으로의 이동, 곧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일어난 부활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은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기대하지 않았고,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그는 살아나셨다." 여전히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사고를 하나님은 부활로 전환시키십니다. 이 선언은 단지 부활 사건의 알림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함을 알리는 영적 전환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 속에서도 무덤을 찾아 헤맵니다. 주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는 곳, 과거의 아픔과 죄책감, 실패와 좌절 속에서 예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새로운 생명과 소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주님을 찾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룩한 질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천사는 이어서 말합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부활의 메시지는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이미 주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억될 때, 제자들의 믿음이 회복됩니다.

"기억하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 mnēsthēnai로, 단순한 상기 이상의 뜻을 내포합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그 말씀에 기초한 삶의 방향을 회복하라는 강력한 영적 요청입니다. 부활은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흐르는 말씀의 성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준비된 약속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눅 9:22, 18:33).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이 어렵다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지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도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해석의 틀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들은 말씀을 잊지 않고 붙드는 데서 시작됩니다. 부활 신앙은 '기억하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 우리가 들은 진리,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복음이 삶의 중심에 놓일 때,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전체의 신학적 핵심을 응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획된 순종이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하여야 하리라"입니다. 헬라어로는 dei라는 조동사로, 이는 필연성과 신적 필수성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던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부활 역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손에 넘겨지셨습니다. '죄인들'(hamartōlōn)은 단지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고, 제삼일에 살아나심으로 그 죄의 대가를 이기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연장선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는 십자가가 무의미해집니다. 이 둘은 구속사의 양날개이며, 우리의 구원이 단순한 죄 사함을 넘어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그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고난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인내, 절망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영혼은 바로 이 부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결론

누가복음 24장 6-7절은 부활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 말씀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묶인 삶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덤을 찾는 자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증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 삶의 모든 순간 속에 당신의 생명과 능력으로 함께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 기억을 품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야 합니다. 이 부활의 복음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모든 성도들 위에 하늘의 소망과 능력을 부어주시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